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시스코 피사로 (문단 편집) ===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 === 쿠스코 역시 구원지원이 없이 고립된 것은 둘째 치고, 리마로부터 어떤 소식도 받을 수 없었다. 이와 반대로 망코 잉카는 유판키의 승전 소식과 전리품을 받고 큰 기쁨에 싸이게 되었다. 그래서 이 전리품들을 쿠스코의 스페인인들에게 자랑삼아 던졌는데 문제는 이 전리품들이 바로 스페인인들의 머리와 '''조각조각 찢어진 편지'''였던 것이다. 스페인인들의 머리통은 일단 그렇다치고[* 사실 적들에게 공포심을 심어주고 사기를 낮추는 목적이라면 나쁜 선택은 아니다.] 편지는 엄청난 실수였다. 이 편지는 사실 리마에서 고립되어 있는 쿠스코의 병력에게 보내는 전갈이었고, 쿠스코의 수비병들은 이 조각난 편지들을 한데 모아서 복원해냈다. 이렇게 해서 리마에서 보낸 전갈을 통해 >"우리는 상황을 알고 있다. 구원병력도 계속해서 보낼 것이다. 참고로 요사이 본국에서는 이러구러한 일들이 있다." 등의 내용을 읽고 쿠스코의 스페인인들은 용기를 얻게 되었다. 잉카인들이 [[문자]]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여 찢어진 조각들을 모아서 다시 읽을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 저지른 실수였던 것이다. 어쨌든 여건이 불리함을 알게 된 피사로 가문의 둘째이자 쿠스코 수비대의 총 지휘관이었던 에르난도 피사로는 단 한 번의 도박으로 전황을 뒤집기로 했다. 쿠스코에서 50km 떨어진 망코 잉카의 본영, 즉 오얀타이탐보를 습격해 망코 잉카를 생포하기로 한 것이었다. 때는 1537년 1월이었다. 하지만 잉카인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본진 방어를 게을리할 리가 없었으며 오얀타이탐보의 한 계곡에서 30,000명의 수비대가 에르난도의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 이 수비대에는 [[아마조니아]]에서 불러온 정예 [[궁병]]까지 존재했던 데다가, 싸움이 벌어진 곳은 물이 흐르는 곳으로 기병들에게 영 불리한 지형이었다. 심지어 잉카인들은 둑을 터뜨려 기마대의 기동력을 방해하는 작전까지 구사했다. 결국 에르난도 부대는 숱한 사상자를 내고 쿠스코로 철수했다. 이것이 '''오얀타이탐보 전투'''(Batalla de Ollantaytambo)이다. 다만 이 전투의 결과에 대해선 의견이 분분하다. 일단 대부분의 견해는 "스페인 측의 확실한 패배"라는 것이다. 실제로 이 전투 이후 스페인인들은 다시 요새에 처박힌 신세가 되었으며, 잉카인들과 망코 잉카의 사기는 하늘을 찔러 쿠스코에 대한 공세가 계속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페인인들이 "비록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전쟁에는 이겼다"라는 견해도 있다. 일단 이번 전투에서도 잉카인들의 피해 규모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되며, 특히 승리에 고무된 탓인지 망코 잉카가 바로 아래에서 언급될 '''대실수를 저지르게 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